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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는 한국인 선을 긋는 일본인 :심리학의 눈으로 보는 두 나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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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는 한국인 선을 긋는 일본인 : 심리학의 눈으로 보는 두 나라 이야기
서울 : 부키, 2022
396 p. ; 21 cm


  소장사항 : 을지대학교 학술정보원[의정부] [ 155.8951 한38ㅅ ]

등록번호 소장정보
11007050 대출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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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장위치 : 단행본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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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07051 대출가능
  • Vol.Copy : c.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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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장위치 : 단행본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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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과 일본인은 과연 얼마나 다를까? 한국의 공연장이 떼창으로 가득 찰 때, 일본은 왜 기껏해야 조용히 박수만 칠까? 한국에는 온갖 의미의 다양한 욕이 존재하는 반면, 일본에는 왜 딱히 욕이랄 것이 없을까? 한국인들이 여럿이 어울리는 롤플레잉 게임(리그 오브 레전드 등)을 즐길 때, 일본인들은 왜 혼자서 하는 콘솔 게임(닌텐도 등)을 좋아할까? 한국에는 왜 프로불편러가 많을까? 일본인은 왜 빈집에 돌아와서도 인사를 할까? 가까운 것 빼면 거의 모든 게 다른 두 나라 한국과 일본은 놀랄 만큼 다른 삶의 양상을 보인다. 일본인들이 이세계(異世界)를 배경으로 한 애니메이션 속에서 갈등을 외면하고 환상의 세계로 도피할 때, 한국인들은 〈오징어 게임〉 〈미나리〉 등을 통해 고통스러운 현실을 직시하고 ‘관계’에서 희망을 찾는다. 일본에서 ‘여자력’으로 무장한 소녀들이 귀엽고 순종적인 매력을 발산할 때, 한국에서는 〈스우파(스트리트 우먼 파이터)〉의 쎈 언니들이 편견을 ‘찢고’ 무대를 휘어잡는다. 목소리가 큰 한국인 vs 조용히 자리를 지키는 일본인 이러한 차이는 어디에서 왔고, 또 어떤 미래로 이어질까? 같은 인종에 유교, 집단주의 문화 등을 공유하는 비슷한 사람들로 묶이기 쉽지만, 두 나라 사람들은 스스로를 바라보는 태도에서부터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한국인은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미치려고 하는 존재’로 보는 반면, 일본인은 자신을 ‘다른 사람의 영향력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존재’로 보기 때문이다.(116쪽) 한국인이 ‘이기고’ 싶어 게임을 잘하는 것(38쪽), 자신의 ‘주관적’ 친밀감을 바탕으로 정을 베풀고자 하는 것,(124쪽) 이래라저래라 참견하는 것이나(130쪽), 일본인이 주어진 사회적 역할에 부담을 느끼는 것,(357쪽) 되도록 은혜를 입지 않고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것(132쪽) 모두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한국에 유독 프로불편러들이 많은 것도 이와 관련 있다.(319쪽) 한국인은 일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그 ‘억울함’이 쌓여 ‘화병’으로 표출되고,(173쪽) 일본인은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줄지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여 대인공포증에 걸린다.(174쪽) 이러한 차이가 사회적으로 드러난 현상이 바로 최근 늘어나고 있는 ‘은둔형 외톨이’인 듯하다. 일본의 ‘히키코모리’는 일본 인구의 1%에 달하며, 일체의 사회활동을 거부하고 부모의 도움을 받아 살아간다. 반면 한국의 ‘자연인’은 세상일과 세상 사람들에게 얽매일 필요가 없는 곳으로 떠난다. 히키코모리가 방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안 하며 무력하게 지낸다면, 자연인은 산에서 자립하며 삶의 이유를 찾는다. 두 나라 사람들의 특성에서 이러한 차이의 답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177쪽) 먹방의 나라 한국 vs 야동의 나라 일본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구인 두 행위는 어떻게 두 나라를 대표하는 콘텐츠가 되었을까? ‘성진국’이라는 명성(?)까지 얻은 데 비해 성생활 만족도 지수는 꼴찌를 기록한 일본. 야동에는 ‘엿보기’라는 왜곡된 방식으로 타인과 소통하고자 하는 일본인의 욕구가 반영되어 있다.(17쪽) 반면 수시로 건네는 “밥 한번 먹자”라는 인사처럼, ‘밥’은 한국에서 관계를 매개하는 중요한 상징이자 관심, 사랑의 표현이다. 먹방을 시청하며 소통하는 것은 관계에 대한 욕구가 가장 한국적으로 드러난 문화 현상이다.(23쪽) 이처럼 한국인과 일본인의 또 다른 차이는 ‘관계’에 대한 태도에서 비롯된다. 한국인은 자신과 타인의 입장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고 여기며, 일본인은 자신을 타인과 명확히 구분되는 존재로 간주하고 서로 피해를 끼치지 않으려고 한다.(110쪽) 한국인이 여럿이 어울려 다양한 역할을 맡는 MMORPG(멀티 유저 다중 접속 롤플레잉 게임)을 즐기고, 일본인이 게임기와 일대일 플레이를 하는 방식의 콘솔 게임을 주로 하는 것도 이러한 태도와 연관된다.(36쪽) 한국인의 관심은 때로 상대방의 영역에 지나치게 깊게 들어가 ‘오지랖’ 문화를 형성하기도 한다. 대인 관계에 피로감을 느끼는 한국 젊은이들 중에는 이러한 문화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남에게 폐 끼치지 않는 깔끔한 일본식 인간관계를 선호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단편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곤란하다. 관심과 오지랖을 통해 한국인들이 당연한 듯 누리고 있는 정서적 지지가 이루어지고, 예의 바르게 보이는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본인들이 심리적 압박을 겪는 것은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이기 때문이다.(110쪽) 치열한 현실을 마주하는 한국 vs 아름다운 세계에 갇혀 버린 일본 현실에 대한 태도에서도 두 나라의 차이가 뚜렷이 나타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일본의 애니메이션과 한국의 드라마와 영화이다. 일본인이 애니메이션을 통해 환상의 세계를 보려 하는 반면, 한국인은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현실 세계를 보려 한다고나 할까. 일본 애니메이션이 현실에 직접 개입하는 대신 우주나 미래 등 판타지 세계를 배경 삼아 ‘비유적으로’ 현실 문제를 그려 낸다면 한국은 일제강점기, 6.25, 군사정권, 민주화 운동 등 가슴 아픈 역사도 거침없이 마주한다.(49쪽) 괴물이나 귀신, 외계인이 등장해도 집세 걱정하고 월급 걱정하며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니 너무 현실적이어서 비현실적일 정도다. 반면 ‘이세계’를 배경으로 한 일본의 애니메이션 속에서는 어두운 현실은 찾아보기 힘들다. 동화 같은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언성을 높이거나 얼굴 붉히는 일 없이 아름답게 갈등이 해결된다.(159쪽) 〈원피스〉나 〈포켓 몬스터〉 등에서 나타나듯 친구끼리 폐쇄적인 집단을 이루며, 언제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한다. 칸 영화제 대상을 수상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어느 가족〉이 일본의 어두운 면을 들춰 냈다는 이유로 냉담한 반응을 얻은 것을 보면,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을 애써 보지 않으려는 절박함마저 느껴지는 듯하다.(54쪽) 골든 크로스는 이미 시작됐다 한국의 위상이 달라졌다. 빌보드 1위를 석권한 BTS부터 한국적인 콘텐츠로 승부해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기생충〉, 넷플릭스 전세계 1위에 오른 〈오징어 게임〉 등 당장 눈에 띄는 지표들뿐 아니라 한류에 힘입어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8쪽) “가위바위보를 해도 일본은 이겨야 한다”는 말을 농담처럼 내뱉던 한국은 2019년 한국에 대한 일본의 갑작스러운 무역 제재에도 놀랄 만큼 타격을 입지 않았고, 코로나 팬데믹에도 K-방역이라는 빠른 대처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오랫동안 ‘넘사벽’이었던 일본은 더 이상 없다. 많은 분야에서 한국은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고 심지어 어떤 분야는 일본을 넘어서고 있다.(10쪽) 어떻게 이런 일들이 가능했을까? 답은 문화에 있다. 여러 권의 저서를 펴내고 강연 활동을 지속하며 오랜 기간 ‘문화’에 천착해 온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문화가 한 나라와 그 구성원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우리의 눈앞에 낱낱이 펼쳐 보인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아 온 한국과 일본, 두 나라에 대한 이야기는 그야말로 저자가 해 온 연구의 최정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곳곳에 담긴 문화심리학 이론과 학술적으로 숙성된 견해는 단순히 두 나라를 비교하는 것을 넘어서서 문화심리학 입문서로도 손색이 없다. 이 책은 가깝고도 먼 나라 한국과 일본, 두 나라 사람들이 하는 수많은 행동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그 출발점을 밝힌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과 행동에 주목하다 보면 끊임없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결론으로 되돌아올 뿐이다. 하지만 그 아래 깊고도 단단하게 자리잡은 문화를 되짚어 가면 엉망진창으로 얽힌 오해의 실타래가 한순간에 풀어지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본문중에서

먹방의 나라 한국 vs 야동의 나라 일본 혼밥, 혼술이 더 이상 어색하지 않고 나 혼자 사는 것이 새로운 생활 스타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대인 관계에 대한 욕구는 그렇게 쉽게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먹방은 관계에 대한 욕구가 가장 한국적으로 드러난 문화 현상일 것입니다. 그 방식 역시 물론 꽤나 한국적인데요. 보통 야동이 일방적으로 성행위 장면을 보여 준다면, 먹방은 시청자와의 쌍방향 소통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시청자들이 채팅창이나 댓글을 통해 먹방에 반응하고 BJ나 유튜버가 시청자들의 요구를 반영하는 식이죠. 먹방 중에 실시간 댓글 창이 같이 떠 있는 경우도 흔한 모습입니다. 끊임없이 서로 영향을 미치고 피드백하며 함께 뭔가를 만들어 가는 것.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사회적 교류의 방법입니다. 각자의 영역에 선을 긋고 그 안으로 침범하는 것을 꺼리는 일본인들과는 다른 방식이죠. (24~25쪽) 쎈 언니들의 나라 한국 vs 귀여운 소녀들의 나라 일본 어느 분야에서나 늘 그래왔듯이 한국은 겉으로 보면 우당탕탕 대소동이지만 거시적 관점에서는 한 발 한 발 달라져 왔습니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떨까요? 일본의 성역할에 대한 생각은 아직도 매우 전통적입니다. 최근 한국에서는 〈스우파(스트리트 우먼 파이터)〉의 열기가 뜨거웠는데요. 무대를 휘어잡는 쎈 언니들의 활약에 많은 시청자가 열광했습니다. 그동안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댄서들의 역량과 저력, 그리고 댄서(안무가)라는 직업, 춤에 대한 열정과 철학은 시청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죠. 일본인은 이런 한국 여성들을 ‘무섭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스우파 댄서뿐 아니라 K-팝 가수에 대해서도 이런 생각은 이어지는데요. 일본의 여성은 매우 나긋나긋하고 여리여리한 모습을 주로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본의 여성성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것이 J-팝과 애니메이션, 게임 등 일본의 문화콘텐츠에 등장하는 ‘소녀들’입니다. (29쪽) 막장의 한국 드라마 vs 이세계의 일본 애니 두 나라 사람들이 현실을 보는 방식과 관련되어 각 문화콘텐츠의 차이는 두드러집니다. 일본인은 애니메이션을 통해 환상의 세계를 보려 하는 반면, 한국인은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현실 세계를 보려 한다고 할까요? 물론 일본 애니메이션이 ‘인간의 문제’에 손 놓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방법이 현실에 직접 개입하는 식이 아니라는 뜻이죠. 대부분의 일본 애니메이션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세계, 존재하지 않는 인물들 간의 사건을 통해 ‘비유적으로’ 현실의 문제를 떠올릴 수 있게 합니다. 우주나 미래, 판타지 세계를 배경으로 한 깊이 있고 철학적인 질문들을 던지는 것은 일본 애니메이션만이 할 수 있는 접근이죠. 그러나 한국의 드라마나 영화는 현실을 직접 다룹니다. 일본이나 중국 등 주변국에 비해 한국은 역사 관련 콘텐츠의 제작이 단연 두드러지는데요. 일제강점기, 6.25, 군사정권, 민주화 운동, IMF 등 가슴 아픈 역사도 거침없이 다룬다는 점이 한국의 특징입니다. (49쪽) 표정이 큰 한국의 탈 vs 표정 없는 일본의 탈 일본인은 기본적으로 자신과 타인이 명확히 구분되는 존재라는 전제 아래 관계를 맺습니다. 서로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을 꺼려 하고 사회적으로 규정 지어진 행동반경 안에서 행동하는 것을 편안해하는 것은 이러한 전제에서 비롯되는 문화입니다. 반면, 한국인들은 기본적으로 자신과 타인의 입장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는 전제 아래 대인 관계를 해 나갑니다. 한국인들이 말하지 않아도 상대의 마음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고(이심전심), 때로는 상대방의 영역에 지나치게 깊게 들어가거나(참견) 상대가 원치 않는 오지랖을 부리는 것 또한 이러한 전제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인 관계에 피로감을 느끼는 한국 젊은이들 중에는 이러한 ‘오지랖 문화’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깔끔한 일본식 인간관계가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문화는 그렇게 단편적으로만 바라봐서는 곤란합니다. 관심과 오지랖을 통해 한국인들이 당연한 듯 누리고 있는 정서적 지지가 이루어지고, 깔끔하고 예의 바르게 보이는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본인들이 심리적 압박을 겪는다는 것은, 한국 문화에 익숙한 우리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이기 때문이지요. (110쪽) 한국의 갑질 vs 일본의 이지메 갑질의 동기 역시 통제감의 극대화라 할 수 있습니다. 결핍된 통제감을 충족하는 한국적인 병리 현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갑질의 양상은 이지메와는 차이를 보입니다. 이지메가 ‘집단의 규범을 어긴 개인에 대한 집단적 응징’의 성격을 갖는다면, 갑질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려는 개인적 행위’라는 점이 두드러집니다. 을에 대한 괴롭힘은 갑인 자신에게 걸맞은 대우를 하지 않았다는 것에 초점이 있지요. 상대방 탓을 한다기보다는 우월한 자신을 드러내고 느끼는 것이 갑질의 심리적 기능으로 보여집니다. 또한 방식에 있어서도 이지메가 은밀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면 갑질은 드러내 놓고 보란 듯이 한다는 차이도 있는 것 같습니다. 피해자들의 심리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이지메에 순응하는 일본인과는 달리 한국인은 갑질을 대단히 부당하다고 지각합니다. 상대방과의 지위 차이나 상황 때문에 일시적으로는 복종하지만 갑의 처사를 마음속으로 받아들이거나 갑질을 받아들여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내면화하지는 않죠. (142쪽) 산으로 들어가는 자연인 vs 방으로 들어가는 히키코모리 이들은 산 생활에서 자유를 느낀다고 이야기합니다. 산에서는 더 이상 세상일과 세상 사람들에 얽매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연인들이 산으로 들어가는 이유입니다. ‘들어간다’라는 말을 썼지만 히키코모리가 방으로 ‘들어가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산으로 들어간다기보다는 집을 나간다고 해야 할까요. 히키코모리와 마찬가지로 외톨이 생활이지만 자연인의 삶은 다릅니다. 그들은 산속에서 자연과 계절의 흐름을 온몸으로 느끼며 자신이 먹고살 것들을 마련합니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산으로 들어온 이들은 산에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며 삶의 이유를 찾아내는 듯합니다. (182~183쪽) 한을 품은 한국 귀신 vs 자리를 지키는 일본 귀신 한 때문에 귀신이 되고 한을 풀기 위해 사람에게 나타나는 한국의 귀신과 역시 저세상으로 가지 못할 만큼의 큰 원한을 품었으나 자신이 죽은 곳에 머물면서 자신과 큰 관계 없는 이들에게까지 해를 끼치는 일본의 귀신. 사람들과 친숙하고 함께 어울려 살며 웬만해서는 해를 끼치지 않는 한국의 요괴와 자신들의 영역이 확고하고 이를 침범한 인간들을 확실하게 응징하는 일본의 요괴. 한국인과 일본인 마음의 어떤 차이가 여기에 투영되어 있을까요? (199~200쪽) 삼세판의 씨름 vs 단판의 스모 즉, 한국인들의 자기 인식은 ‘실제의 자기 가치보다 높은’ 자기 가치감에 근거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 가치감이 높다는 것은 시쳇말로 ‘근자감’, 즉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 할 수 있는 자기 인식인데 이러한 자기 인식의 방식이 한국인에게 유형화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자존심 강하고 지기 싫어하는 한국인들은 한 번의 승부로 패배를 인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적어도 세 판에 두 번은 져야 “이번엔 내가 졌다”는 소리가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 두고 보자!”라는 말이 따라붙는 것은 물론이고요. 그러나 일본인들은 다릅니다. 한 번의 승부로 생사가 갈리는 칼의 문화여서 그랬을까요. 한 번의 승부로 승패가 갈리면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패배를 받아들입니다. 승자로서의 상대와 패자로서의 자신의 지위를 인정하는 것이죠. (205~206쪽) 한국의 어울림 vs 일본의 와 따라서 어울림은 ‘탈개성화의 조화’로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개개의 주체가 각자의 소리를 내지만 전체적으로는 어우러지는 모습이죠.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조화스럽지 않고 뒤죽박죽으로 보이지만 거기에는 분명 나름의 법칙과 흐름이 존재합니다. 자신의 개성을 드러낸다고 해서 그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죠. 자유로운 자기 표현과 전체를 위해 지켜야 할 어느 정도의 선. 그 선을 넘나드는 맛이 어울림의 묘미입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인 비빔밥은 이러한 어울림의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각종 나물과 고기, 계란, 밥, 참기름, 고추장 등 모든 재료가 각자의 개성을 잃지 않지만 그들이 섞여 또 다른 하나로 완성되는 것이죠. 일본을 대표하는 음식이 스시인 것 역시 인상적입니다. 얇게 저민 생선 살은 밥과 섞이지 않고 정확히 경계 지어 있습니다. 가츠동, 텐동 등 덮밥 종류도 그렇고요. 물론 배 속에 들어가면 똑같겠지만 일본인들이 무엇이든 명확히 나뉜 것을 선호한다는 하나의 사례가 될 것 같습니다. 전체와 개인의 역할처럼 말이죠. (263~264쪽) 왜 한국인들은 고속버스춤을 출까 따라서 고속버스춤은 신명에 도달하기 위한 제의입니다. 이 신명을 내기 위해 사람들은 긍정적 기분을 느낄 수 있는 행위에 몰입합니다. 빠른 비트의 음악은 감정을 고조시키고 함께하는 이들과의 공감은 이러한 감정을 더욱 끌어올리는 기폭제가 됩니다. 마침내 체면 때문에, 성격 때문에, 사회적 지위 때문에 평소에는 하지 못하던 그 어떤 행동도 허용되는 완벽한 자유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답답하던, 막혔던 기운이 터져 나와 자유롭게 흘러넘치는 순간입니다. 서로의 눈빛을 통해 이를 확인한 다음부터 그곳은 이미 신명의 세계입니다. 이 신명을 맛보기 전까지는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잠시의 일탈이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 신명을 향한 욕구는 더욱 불타오?

  목차

프롤로그: 골든 크로스는 이미 시작됐다 1부 한국 문화와 일본 문화 이렇게나 다릅니다 먹방의 나라 한국 vs 야동의 나라 일본 | 쎈 언니들의 나라 한국 vs 귀여운 소녀들의 나라 일본 | 온라인 게임의 한국 vs 콘솔 게임의 일본 | 떼창하는 한국인 vs 감상하는 일본인 | 막장의 한국 드라마 vs 이세계의 일본 애니 | 욕하는 한국인 vs 예의 바른 일본인 | 사람을 믿는 한국인 vs 시스템을 믿는 일본인 | 반일의 이유 vs 혐한의 이유 | 한국의 국뽕 vs 일본의 국뽕 | 오냐오냐 한국 부모 vs 칼 같은 일본 부모 # 문화 읽기의 디딤돌: 문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2부 한국인과 일본인의 ‘종특’의 탄생 표정이 큰 한국의 탈 vs 표정 없는 일본의 탈 | 주체성 자기의 한국인 vs 대상적 자기의 일본인 | 한국인의 정 vs 일본인의 아마에 | 선을 넘는 한국인 vs 선을 긋는 일본인 | 한국의 갑질 vs 일본의 이지메 | 자기애성 성격의 한국인 vs 회피성 성격의 일본인 | 한국인의 동일시 vs 일본인의 환상 | 감정적 한국인 vs 이성적 일본인 | 한국인의 화병 vs 일본인의 대인공포증 | 산으로 들어가는 자연인 vs 방으로 들어가는 히키코모리 # 문화 읽기의 디딤돌: 개미가 코끼리를 이해하는 방법 3부 문화를 뜯어 보면 숨은 그림이 보인다 한을 품은 한국 귀신 vs 자리를 지키는 일본 귀신 | 삼세판의 씨름 vs 단판의 스모 | 영웅이 된 도둑 vs 강한 자가 영웅 | ‘날 넘고 가라’ 한국의 스승 vs ‘나만 따라 해라’ 일본의 스승 | 미륵의 한국 vs 지장의 일본 | 괜찮아요? vs 다이죠부? | 한국인의 부끄러움 vs 일본인의 하지 | 분노하는 한국인 vs 혐오하는 일본인 | 한국의 어울림 vs 일본의 와 | 아버지면 죽이고 보는 한국 vs 아버지를 죽이지 못한 일본 | 한국의 ‘알다’ vs 일본의 ‘와카루’ # 문화 읽기의 디딤돌: 다른 나라 문화를 본받기 어려운 이유 4부 한국인과 일본인의 심층 심리 한류는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 왜 한국인들은 고속버스춤을 출까 | ‘한’이란 무엇일까 | 곰과 호랑이는 왜 사람이 되고자 했을까 | 프로불편러들의 나라 | 드립의 민족 | ‘찢었다’는 말은 어디서 왔을까 | 일본인은 왜 빈집에 돌아와서도 인사를 할까 | 일본인에게 ‘벽’이란 무엇일까 | 일본에는 왜 변신물이 많을까 | 일본 애니 주인공은 왜 필살기에 집착할까 | 거인과 제국주의의 향수 | 일본인이 선을 넘는 경우 | 포켓몬스터로 본 일본의 친구 개념 # 문화 읽기의 디딤돌: 문화 연구에 무의식이 중요한 이유 에필로그: 종의 나라 vs 칼의 나라

  저자 및 역자 소개

한민 저 : 한민 저
고려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심리학과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부 졸업까지는 심리학보다는 한국의 역사, 문화, 특히 국악에 흥미를 갖고 국악인 등 다른 길을 심각하게 고려하기도 하였으나, 한성열 교수의 인도로 마침내 제 신명을 낼 곳을 찾았다. 한국적인 사회·문화현상과 심리학의 연결고리를 찾는 일에 관심이 있으며 현재는 미국 클락대학교에서 방문학자로 못다 한 공부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