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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진한의 정치와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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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진한의 정치와 사회
서울: 일조각, 2022
512 p.: 삽화; 24 cm
권말부록: 1.원삼국시대론 검토, 2.옥저의 기원과 문화 성격
참고문헌과 색인 수록
₩50000


  소장사항 : 을지대학교 학술정보원[의정부] [ 951.901 이94ㅁ ]

등록번호 소장정보
12001077 대출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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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장위치 : 우수학술도서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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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 백제국과 백제, 진한 사로국과 신라는 죽순과 대나무의 관계로 비유된다. 죽순이 자라서 대나무가 된 것은 분명하지만 죽순과 대나무는 엄연히 다른 존재이다. 그 분기점을 어디로 잡느냐 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이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의문은 마한소국연맹체와 진한소국연맹체가 백제와 신라라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정치조직체로 탈바꿈하는 내적·외적 원인이다. 고분, 성곽, 토기, 위세품 등의 고고학적 자료는 이러한 변화의 결과물이다. 우리는 지금 결과물을 토대로 변화의 현상을 추적하고 시기를 추정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 고대국가 형성 과정에 대한 대부분의 연구에서는 백제가 신라보다 무려 100년 이상 앞선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마한 백제국이 진한 사로국과 달리 단기간에 질적·양적으로 급성장을 이룬 배경이나 토대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가 있는 것도 아니다. 백제나 신라 모두 삼한으로부터 성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백제가 신라보다 성장 시기가 빠르고 문화 수준이 앞섰다는 인식은 문헌 중심 연구가 일반적일 때 형성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문헌사가들이 제시한 백제 국가 형성과 발전 단계에 대한 기왕의 인식을 검증하거나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오히려 일부에서는 문헌사가들이 설정한 백제 국가의 발전 도식을 염두에 두거나 이를 의식하면서 고고학자료를 해석하는 경향마저 있다. 저자는 신라 국가 역시 진한 소국들 중 하나였던 사로국이 진·변한의 다른 소국들을 병합하여 성립하였기에 백제의 국가 형성 과정과 공통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문헌기록상 3세기 말까지도 마한과 진한 소국들의 정치·사회적 발달 수준은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대중국 활동이나 문화 교류의 기회도 비슷하였다는 것이다. 고고학자료를 통해 확인되는 기술이나 문화적 수준도 진한 소국들이 앞설지언정 뒤지는 형세는 결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한 백제국은 3세기 후반 고이왕 대에, 진한 사로국은 4세기 후반 내물마립간 대에 연맹왕국 단계에 도달하였다는 것은 합리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증가된 고고학적 물질자료와 연구 성과를 토대로 삼한의 발전 과정, 즉 마한 백제국과 진한 사로국의 성장 과정을 다루고 있다. 특히 백제나 신라의 국가 형성 과정을 연구할 때 백제와 신라에 서로 다른 잣대가 적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폈다. 이는 한국 고대국가 형성에 관한 기왕의 발전 도식을 보완하고 완성도를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함이다. 고고학자료가 크게 늘어난 현시점에서 문헌자료를 토대로 한 백제와 신라 국가 형성에 대한 발전 도식의 검증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앞으로 이러한 논의가 적극적으로 진전되어 체제 변화의 속도와 메커니즘을 밝혀 한국 고대국가 형성사의 핵심 과제들을 하나씩 해결해 나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 책의 구성] I부에서는 삼한 소국 형성의 토대가 되었던 초기철기시대 읍락집단을 다루었다. 1장은 이들이 삼한 소국의 읍락과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하는 데 주력하였다. 읍락집단 수장의 권력 기반이 종교적인 권위에 바탕한 것임을 논증하기 위해 다양한 고고학자료와 민족지자료를 활용하였다. 2장은 초기철기시대 충청·전라 지역에서 크게 번성하던 읍락집단과 청동기들이 기원전 2세기 말부터 급격히 쇠퇴하는 이유에 대해 살펴보고 있다. 저자는 청동기 원료 산지에 주목하였고 위만조선 우거왕 대에 일어난 중국과 서남해안을 잇는 교역로 경색이 쇠퇴의 중요 원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는 삼한 소국 형성의 여명기 내지는 삼한 소국으로 넘어가는 분기점을 찾는 작업이기도 하다. Ⅱ부에서는 마한 사회의 형성과 마한 백제국이 성장하여 백제 국가에 이르는 과정을 다루었다. 1장에서는 마한의 기원과 정치적 성장 과정을 다루었다. 2장과 3장에서는 백제국의 초기 중심지와 하남 이주 시기, 그리고 『삼국사기』에 나오는 마한과 백제국의 상호 관계에 대한 인식을 다루었다. 그러나 기원전 1세기~기원후 2세기에 해당하는 고고학자료의 부족과 공백으로 백제국 형성의 주도 세력이나 초기 백제국의 중심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부분이 의문으로 남아 있다. 그뿐만 아니라 서울·경기 지역의 3세기 이후의 주거지와 무덤 자료들조차도 문헌기록과 일정한 괴리가 있다. 하지만 조금씩 축적되고 있는 중부 지방의 고고학적 성과를 통해 3세기 백제국의 문화적 토대와 정치적 위상을 조금이나마 추론하고 있다. 4장에서는 3세기 고이왕 대 백제국의 정치·사회적 통합 수준에 대한 기존의 견해를 재검토하였다. 저자는 고이왕 대(234~286)는 연맹왕국(부체제)을 확립한 것이 아니라 마한 지역에서 가장 우세한 소국연맹체의 맹주국 지위를 확립한 단계였다고 말한다. 고이왕 대는 신라의 내물마립간이 아니라 진한 사로국의 미추왕(262~284)과 비슷한 발전 단계로 이해하는 것이 역사의 실상에 가깝다는 것이다. 진晉에 보낸 견사 기록과 서남부 지방을 능가하는 경상도 지역의 목곽묘와 부장품 자료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5장에서는 고고학자료들을 근거로 백제 근초고왕 대는 신라 내물마립간 대(356~402)와 비슷한 연맹왕국 단계였음을 서술하고 있다. 근초고왕과 내물마립간의 중국 견사 및 두 지역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는 4세기 대의 고고학적 변화들은 당시 백제와 신라의 정치·사회적 발전 수준에 큰 차이가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6장은 근초고왕 남정(369) 이후의 영산강 유역 옹관묘 사회와 백제 중앙 정부와의 관계에 대한 내용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연구 업적들이 축적되었으나 아직까지도 연구자들 사이에 견해차가 크다. 영산강 유역의 정치체들은 4세기 이후 북방으로부터의 물리적 위협에 직면하여 통합과 체제 개혁이 불가피했으나 소국 통합과 새로운 정치체제 확립에 실패한 것으로 보이며, 결국 백제의 통제권 안에 들어가서 타협과 견제를 통해 생존 전략을 모색해 나간 것으로 저자는 추정하고 있다. Ⅲ부에서는 진한 사로국의 구성과 신라 국가로의 성장 토대를 살피고 있다. 1장에서는 신라 건국 신화에 나오는 6촌이라는 정치체가 후대에 부회된 허구적인 존재가 아니라 경주 일대에서 조사된 목관묘·목곽묘 자료와 출토 유물들을 근거로 역사적 실체임을 논증하였다. 6촌은 사로국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진한 지역 소국 읍락의 공간적 분포 상태나 성장 과정을 파악하는 디딤돌이라고 볼 수 있다. 2장에서는 석씨昔氏 이사금 시대를 중심으로 사로국이 진한소국연맹체의 가장 우세한 맹주국으로 성장하는 배경을 철 생산, 농업생산력 발달, 교역로 확보 등을 통해 설명하였다. 부록의 ‘원삼국시대론’과 ‘옥저’ 관련 논고는 본문과는 다른 맥락이지만 두 편 모두 삼한과 시간대를 공유하는 주제로서 함께 살펴보는 것도 연구사적으로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한다.

  본문중에서

청동기 생산 감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 요소로 기술의 단절, 원료 부족, 철기 보급으로 인한 수요 감소, 관념상의 변화 등을 상정해 볼 수 있다. 청동기 제작 기술을 가진 집단이 어떠한 이유에 의해서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 버리거나 장기간 청동기 제작을 중단하면 기술 단절이 일어날 수 있다. 또는 철기 보급에 밀려 청동기의 실용성이 떨어져 수요가 줄고 생산 활동이 쇠퇴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대로 충청·전라 지역에서 청동 무기 출토량이 줄어드는 것을 주조철기 보급의 영향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무엇인가 청동기 생산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제작 환경상의 변화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중략) 기술 단절과 수요 감소 이외에 청동기 생산 감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원료 수급이다. 어떤 사정으로 원료의 일부라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할 경우, 기존의 청동기를 녹여 재활용하거나 이것도 여의치 않으면 청동기 제작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내부적으로 전통적인 청동기 수요가 강하게 남아 있다면 교역을 통해 문제 해결을 시도하거나 제한적이나마 철로 청동을 대체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졌을 법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충청·전라 지역의 기원전 2세기 말 이후의 청동기 출토 양상을 볼 때 다른 지역의청동기가 적극적으로 유입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충청·전라 지역에서의 청동기 유물의 감소 현상은 수요 감소나 기술상의 문제라기보다 다른 데서 원인을 찾아야 할 것 같다. 그 하나는 청동기 공급 핵심 집단의 이주이고 다른 하나는 원료 부족으로 인한 생산 활동의 위축이다. - ‘Ⅰ부 한반도 초기철기시대의 사회와 문화’ 중에서, 71~73쪽 삼한 중에서 소국연맹체가 가장 먼저 등장한 곳은 마한 지역이었다. 마한 지역에는 소국의 숫자도 많고 분포 영역도 넓어 시기나 지역에 따라 소국연맹체의 대두 시기나 크기 등이 달랐다. 일반적으로 소국연맹체 등장과 변화의 중요 분기점으로 한군현漢郡縣 설치, 대방군帶方郡 설치, 위魏나라의 동방 경략, 백제국의 성장 등을 꼽을 수 있다. 지역적으로는 크게 한강유역권(경기 북부 지역 포함), 금강유역권(아산만 지역 포함), 영산강유역권으로 나눌 수 있다. 이는 문헌기록에 나타나는 3세기 대 각 지역별 유력 소국의 존재를 토대로 한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백제국, 『삼국지』 동이전 한조의 목지국目支國, 『진서晉書』 장화張華열전의 신미국新彌國이 이에 해당한다. 마한 지역 안에서도 소국연맹체 형성이 가장 이른 지역은 금강유역권이며, 이 지역은 3세기 전반까지 마한의 실질적인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문헌상으로 마한 지역에서 소국연맹체로 추정되는 정치체의 존재가 확인되는 것은 기원전 1세기경이다. “옛 망명인이 진역을 피하여 한국에 왔을 때 마한이 동쪽 경계지의 땅을 나누어 주었다”는 『삼국지』 동이전 진한조의 기록이 그것이다. 당시 유이민 집단들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정치체의 실체는 한두 개의 소국이 아니라 소국연맹체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소국연맹체가 처음부터 마한이라고 불린 것은 아니겠지만 마한 지역에 형성되어 있었던 소국연맹체의 존재를 알려 주는 것은 사실이다. 아마 서북 지방에서 내려온 유이민들이 중서부 지방에 자리 잡지 못하고 인구밀도나 정치체 분포 밀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소백산맥 이동 지역으로 내려와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한 것도 이들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외부로부터의 위협에 공동으로 대응하고 서북 지방에서 유이민들이 내려올 때 통제를 가하고 그들에게 지속적인 관계를 요구하는 등 기득권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당시 소국연맹체의 범위나 성격은 불확실하다. - ‘Ⅱ부 마한에서 백제로의 발전’ 중에서, 124~125쪽 이와 같이 경기 북부 지역을 한강권 이남과는 별개의 세력권으로 파악하고 초기 백제국의 중심지를 이곳에 비정할 경우 백제국과 목지국은 처음부터 활동 무대와 정치·문화적 입지가 서로 다른 세력으로 이해된다. 목지국소국연맹체는 중국 군현과 직접 경계를 접하고 있지 않으므로 군현과 충돌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낮았다. 『삼국지』 동이전에 진왕과 목지국에 대해 부정적인 설명이 나타나지 않는 것도 중국 군현과 목지국 사이에 우호적인 교섭 관계가 유지되었던 증거이다. 이와 달리 경기 북부 지역은 중국 군현과 인접해 있기 때문에 선진문화를 빨리 받아들일 수 있는 유리한 점도 있으나 군현의 통제를 쉽게 받을 수 있다는 불리한 점도 있었다. 그리하여 군현의 세력이 강하게 작용할 때는 통합 세력의 형성이 용이하지 않을 것이나 반대로 군현 세력이 약화되면 빠른 시일에 군현에 도전하는 강한 힘을 결집시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백제국은 한강 남쪽, 즉 목지국소국연맹체의 세력권에 가까운 곳으로 중심지를 옮겼고 점차 목지국소국연맹체 세력권 내의 소국들을 잠식해 나갔다. 그러므로 양 세력의 대립이 본격화한 것은 백제국의 활동 기반이 경기 북부 지역에 있을 때가 아니라 한강 남쪽으로 이주한 다음부터이다. - ‘Ⅱ부 마한에서 백제로의 발전’ 중에서, 155쪽 온조왕 대 기록의 마한-백제 관계 인식은 백제 왕실의 부여계 고구려 출자설과 연계되어 있다. 다 알다시피 백제 왕실이 자신들의 출자를 부여계, 혹은 고구려계로 천명한 것이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것이냐 아니면 후대의 정치·외교적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냐를 두고 많은 논란이 있다. 서울 지역에서 확인된 고구려식 적석총의 등장 연대가 문헌기록의 진위를 검증하는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고 있는데 고고학자료상으로는 4세기설이 설득력이 높아 후자 쪽 주장에 무게가 실리는 추세이다. 이렇게 본다면 백제와 마한을 대립, 경쟁하면서 병존하는 관계로 인식한 것도 백제국 건국 초기부터의 일로 보기 어렵고 빨라야 3세기 중엽에서 4세기 중엽 사이 어느 시기일 가능성이 높다. 두 가지 상황을 가정할 수 있는데 하나는 3세기 후반 마한 지역에 복수의 소국연맹체가 병존하는 상태에서 맹주국 간에 야기된 적대감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이다. 다른 하나는 근초고왕近肖古王 대에 활발하게 전개된 정복 과정에서 일어난 대립 상황이다. - ‘Ⅱ부 마한에서 백제로의 발전’ 중에서, 193쪽 3세기 후반 고이왕 대를 ‘연맹왕국’ 단계로 설정하는 문헌적 근거는 고이왕=시조 구태仇台설, 대방군 기리영 공격 사건, 고이왕 대의 통치 체제 정비 기사이다. 이러한 문헌기록은 신뢰성에 많은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실제 이상으로 과대 해석하고 있다. 3세기 후반 서진 견사 기록이 입증하듯이 마한 소국들은 290년대까지도 대외 교섭에서 소국으로서의 독자성을 상실하지 않았고, 백제국 역시 가장 유력한 맹주국일 뿐 다른 소국들을 복속시켜 대외 교섭권을 독점할 정도로 지배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중략) 고고학자들이 주목하는 국가 성립의 고고학적 지표는 성곽의 출현, 대형 분묘군의 출현, 특정 토기 양식의 성립이다. 이를 백제사에 적용하여 백제는 3세기 중후반 일정 영역을 확보한 국가 단계에 도달하였다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백제 국가 성립의 고고학적 지표 그 자체뿐만 아니라 지표로 삼은 성곽, 대형 무덤의 출현 시기 등에 대한 편년이 3세기 후반~4세기 중후반 등으로 편차가 크고 유동적이어서 고고학계의 3세기 후반 백제 국가 성립설 역시 설득력이 떨어진다. 고이왕 대 ‘연맹왕국설’이 성립하려면 3세기 후반 백제국이 마한 소국을 정복하여 간접 통치를 실시하던 상황을 설정하고 이를 물질 자료를 통해 검증해야 한다. 그러나 아직도 고이왕 대 백제국의 통치 영역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다. 다만 3세기 후반~4세기 중반에 걸쳐 중서부 지방에서는 묘제, 철제 무기, 토기, 마구 등 물질 자료상의 점진적 변화가 나타나는데 이를 백제의 영역 확대와 간접 통치를 실현해 나가는 과도기적 현상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어 주목된다. - ‘Ⅱ부 마한에서 백제로의 발전’ 중에서, 248~249쪽 근초고왕 대의 백제 영역에 대해서는 2000년대 이후에는 문헌기록보다 고고학자료를 통한 연구들이 더 많다. 고고학자들은 한성 백제 양식 토기의 확산 과정과 묘제의 변천, 그리고 각종 위세품을 중요 자료로 삼아 백제의 영역 확장 과정을 설명하였다. 그 결과 근초고왕 대 백제의 남계에 대해종래 『일본서기』 신공기의 기록을 토대로 근초고왕 대에 이미 전남 지역까지 영역화하였다는 문헌사가들의 견해와는 상당히 다른 견해들이 제시되기에 이르렀다. 물론 세부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연구자 간에 해석이 다르지만 대체적으로 4세기 중후반~5세기 전반경에는 익산 등 노령산맥 이북 전북 북부 지역까지 백제 영역에 포함되었던 것으로 본다. 그리고 영산강 유역의 백제 영역화 시기에 대해서도 6세기 중엽 이후라는 견해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이 가운데서 근초고왕 대의 직접 통치 영역과 관련하여 경기 남부 화성이나 오산 지역의 경우, 이미 직접 통치 지역으로 편입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일부 있었다. 그리고 2014년 사창리에서 100m 정도 떨어진 화성 향남읍 요리에서 대형 분구묘와 함께 4세기 말 5세기 초로 편년되는 금동관모(그림 Ⅱ-5-2)와 금동신발 등 최상급 위세품을 부장한 목곽묘가 조사되었다. 금동관모의 외형은 공주 수촌리 Ⅱ-1호분 토광묘(그림 Ⅱ-5-3 참조)와 고흥 길두리 안동고분(그림 Ⅱ-5-4 참조) 출토품과 유사하며 환두대도, 각종 마구류 등 부장품의 구성도 사창리유적 출토품과 매우 유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간접 통치의 상징물로 간주되던 최상급의 금동제 위세품이 천안 용원리보다 더

  목차

책을 펴내며 Ⅰ부 한반도 초기철기시대의 사회와 문화 1장 초기철기시대 정치체 수장의 성격 1. 초기철기시대의 정치체 2. 초기철기시대 정치체에 대한 용어 3. 초기철기시대 ‘읍락집단’ 수장의 성격 4. 맺는말 참고문헌 2장 충청·전라 지역 초기철기시대의 청동기 생산 활동 1. 한반도의 세형동검문화 2. 충청·전라 지역 세형동검문화의 전개 과정 3. 세형동검 관련 청동기의 원료 산지 4. 위만조선 우거왕의 대외 교역로 장악 5. 맺는말 참고문헌 Ⅱ부 마한에서 백제로의 발전 1장 마한 사회의 형성과 발달 1. 한韓의 등장 2. 마한 소국의 형성 3. 마한 소국의 성장과 소국연맹체의 형성 4. 맺는말 참고문헌 2장 3세기 마한과 백제국 1. 마한과 백제국의 관계 2. 초기 백제국의 중심지와 목지국의 세력 범위 3. 백제국의 하남 이주 시기와 배경 4. 백제국의 성장과 목지국소국연맹체의 쇠퇴 5. 맺는말 참고문헌 3장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타난 마한에 대한 인식 1. 백제본기 온조왕 대의 마한 기록 2. 백제국의 물질문화 3. 3세기 중엽 마한 지역 소국연맹체의 변화 4. 고이왕 대의 정치·사회적 통합 수준 5. 맺는말 참고문헌 4장 백제 고이왕 대 연맹왕국(부체제)설 검토 1. 한국 고대의 국가 형성과 발전 과정 2. 소국연맹체와 연맹왕국(부체제)의 개념 3. 고이왕 대는 ‘연맹왕국’ 단계인가? 4. 고고학계의 백제 국가 성립에 대한 연구 5. ‘연맹왕국’ 단계의 통치 형태와 물질 자료 6. 맺는말 참고문헌 5장 백제 국가 형성 과정을 둘러싼 중요 쟁점 1. 문제 제기 2. 고이왕 대는 부체제 단계였나? 3. 근초고왕 대는 중앙집권적 귀족국가 단계였나? 4. 맺는말 참고문헌 6장 4~5세기 영산강 유역 토착 세력의 성격 1. 영산강 유역의 옹관고분 2. 영산강 유역 토착 세력에 대한 연구 동향(1980~1990년대) 3. 4세기 후반 옹관고분 축조 집단의 정치·사회적 성격 4. 5세기 영산강 유역 정치체의 실상 5. 영산강 유역 토착 세력과 백제의 관계 6. 맺는말 추기追記 참고문헌 Ⅲ부 진한에서 신라로의 발전 1장 고고학자료로 본 사로국 6촌 1. 사로국의 구성 2. 사로국 6촌에 대한 이해의 방향 3. 대규모 집단 묘역墓域의 등장 4. 경주 일원의 목관묘·목곽묘 유적과 6촌 5. 맺는말 참고문헌 2장 진한 사로국의 성장 1. 사로국의 내부 구성 2. 고고학상으로 나타난 사로국의 변화 3. 이사금 시기 사로국의 성장 4. 진한소국연맹체와 사로국 5. 맺는말 참고문헌 부록 부록 1 원삼국시대론 검토 1. 원삼국시대란? 2. 원삼국시대 개념 정리 3. 문헌사에서 본 1~3세기 4. 원삼국시대의 문화적 성격 5. 맺는말 추기追記 참고문헌 부록 2 옥저의 기원과 문화 성격 1. 문제 제기 2. 연구 현황과 문제점 3. 옥저의 기원 4. ‘옥저’문화와 단결-크로우노프카문화 5. 옥저의 공간적 확대 6. 북옥저의 지리적 범위 7. 맺는말 참고문헌 찾아보기 장별 원출처

  저자 및 역자 소개

이현혜 저 : 이현혜 저
1949년 대구 출생. 영남대학교에서 학사·석사를 마치고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림대학교 사학과에서 정년을 마치고 현재 한림대학교 명예교수이다.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을 거쳐 매장문화재 분과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주요 연구 분야는 삼한의 형성과 정치·사회적 발달 과정, 고대사회의 농업기술과 교역체계 등 한국고대의 정치사, 경제사이다. 『삼한사회형성과정연구』, 『한국 고대의 생산과 교역』, 『백제의 왕권은 어떻게 강화되었나』(공저), 『현대한국사학과 사관』(공저), 『한국사 시대구분론』(공저), 『한국고대의 수전농업과 수리시설』(공저), 『강원도사』(공저) 등의 저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다.